기자는 ‘뱃놈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사람에게 ‘뱃놈의 아들’이란 얘기를 하면 왜 그렇게 아버지를 욕되게 하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기자의 본심은 아버지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뱃놈의 아들’이란 단어외에 달리 기자와 아버지의 정체성을 표현할만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어서다.
아버지는 40년 가량 낙동강 하구에서 어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뱃일을 도우기도 했다.
도움이래야 기껏 강바닥에서 건져 올리는 조개외에 필요없는 것들을 가려내는 것들이었지만 기자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을숙도의 갈대밭 사이를 누빌 때 아름다운 햇볕이 따사롭게 누비던 여름 한철도…
뱀장어와 고기를 잡아 오기위해 며칠 밤을 낙동강 상류로 올라갔다가 돌아 오는 날, 어머니와 함께 선창가에서 새벽을 하얗게 지새우던 기억들도..
이제는 아스라이 스러져 가는 타버린 모닥불 같지만
그래도 아직 불씨는 남아 있는가 보다.
1995년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미국에 발을 내디딘 후,
2012년 말, 시민권을 받자마자 한국 땅을 밟았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낙동강 하구의 추억을 찾아 을숙도를 찾았다.
옛날의 을숙도, 옛날의 낙동강이 아니었다.
4대강 개발, 경제개발이란 단어속에 낙동강의 아스라한 추억은 어디론가 지워져 가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터 위에는 수십층의 아파트들이 들어서 옛날 동네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버지는 생전에 낙동강 하구둑 공사를 반대했다.
강과 바다 사이를 막아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를 40년 뱃놈의 경험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 잘난 교수의 이론 덕분에 하구둑 공사는 진행됐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어느 대학인지는 말하기 싫다.
그나마 낙동강을 잘 아는 대통령이 5년간 국정을 맡게 됐다.
언제쯤 대한민국은 뱃놈이 말하는 이야기를 순수하게 들어주는 나라가 될까?
촛불집회가 그 물꼬를 터는 계기가 되었을까?
아직 안심이 안된다.
한반도 통일.
이제는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외교학과를 다니던 1990년대, 한반도 통일이론에 대한 논문이 1천편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반도 통일은 커녕 이산가족 상봉조차 요원하다.
통일은 이론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러면 통일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20년동안 기자의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흐름’이다.
그 흐름은 빠를수도 늦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와 성경에서 통일문제를 고민한 기자는 최근에야 그 해답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20년만의 기도응답으로 기자는 받아들인다.
왜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이스라엘 문제와 한반도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자가 발견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바로 한반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처음 한국에서 교계 기자를 할 때는 다양한 신학적인 이론때문에 상당한 곤혹을 치뤘다.
하지만 지금의 기자는 신학이론보다 성경말씀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데 한 점의 의심도 없다.
bible1311.com 선지서 부분에서 기자의 일부 생각을 피력한 바 있다.
기자는 신학교를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이론가나 설교가가 아닌 ‘뱃놈의 아들’로서 앞으로 성령이 허락한 한반도 통일문제를 언급하려 한다.
기자는 중학교 때 그 비전을 받았으며 대학 졸업 때까지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1992년에 그 일에 몸을 던졌다. 지금까지 기자의 노력만으로 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한반도라는 영화의 결론을 알고 있는데 기자가 그 한 부분을 담당하는 역을 맡으면서 그 진행과정을 주시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 몹씨 흥분된다.
아버지.
뱃놈의 아들이 무모하게 미국에 도전한 것처럼
다시한번 몸을 던져 도전하려 합니다.
아버지와 이 문제로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저를 하늘에서 계속 응원해 주실거죠 !
그러면 저는 이곳 미국에서 아버지를 향한 기쁨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 편히 쉬세요.
Stone Choi.